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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광장 - 정용덕> 주민등록번호의 명암
국가 형성 · 유지 필수적인 제도
공익위해 쓰여야할 개인 정보
오남용 이젠 심각한 수준
공익 · 국민권익 보호 개혁 절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도망자(The Fugitive)’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다. 그후 1990년대 초에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어 ‘대박’을 치기도 했던 이 연속극은 아내를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의사가 여기저기 피신하면서 진범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매주 한 시간씩 방영된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사건에 연루되는 이야기로 일 년 이상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미국이니까 이와 같은 도망자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워낙 땅이 넓은 나라인 데다가, 요즈음 ‘미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보통신기술에 의한 위치추적이 가능하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행정학도인 필자에게 ‘도망자’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로 여겨진 것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의 주민파악 행정시스템이었다. 이 나라는 호적이나 주민등록제도는 물론이고 운전면허증 외에는 개인식별을 위한 신분증조차 없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주거지를 바꾸려면 이사하기 전에 거주지의 반장에게 도장을 받아 동사무소에 ‘전출신고’를 하고, 이사 들어가는 지역의 반장에게 역시 도장을 받아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해야만 했던 시절이다. 여기에 더해 주민등록번호가 정비되어 있었다.

주민파악 행정은 국가의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인 제도다. 주민파악이 정확해야 비로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병역, 조세 등) 자원을 국민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으며 국민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도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미국에서 내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에게까지 반드시 발급하는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는 후자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남북 분단의 대치 상황에서는 안보적 이유에서도 긴요한 제도다. 필자가 통독 전후에 머물던 베를린의 경우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정교한 주민파악 행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주민파악을 위한 행정능력은 국가강도(state strength)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19세기 후반에 340명의 행정관을 직접 지방에 파견하는 등 외형상으로는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왕조지만, 공정하고 효율적인 자원 확보와 서비스 제공을 위해 필요한 주민파악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취약국가에 불과했다. 동시대인 메이지 4년에 ‘임신호적(壬申戶籍)’을 통해 주민파악 행정의 제도화에 성공한 일본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주민 파악 행정이 구축된 것은 대한민국이 출범하고도 무려 20년이나 지난 1968년의 제1차 주민등록법 개정 이후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주민파악 제도의 근간인 주민등록번호가 공익을 위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 이외의 목적에 오남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 하혜영 연구원이 보고서에서 지적하듯이, 일본을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개인식별번호에 개인의 민감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극히 제한된 공공행정 업무에 사용”될 뿐이다. 공익 증진과 국민권익 보호에 모두 부합하는 주민등록번호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정용덕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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